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다. 그 결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를 적용되지 않는 경 우가 너무 많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 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긴 하다.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베드로는 연약 하여 주님을 부인한 그 순간에도 주님을 깊이 사랑했다. 그랬기 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심히 통곡한 것이다. 베드로와 유다 가 다른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유다도 주님을 판 것을 후회했 고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자백했지만, 그는 회개하고 주 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잘못을 괴로워하였을 뿐이었기 에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는 한 번도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동일시한다(롬 8:28). 심지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다(고전 16:22). 야고보도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자기를 사랑하는 자 들에게 약속하셨다”고 말하면서, 믿음에 부요한 자와 하나님 을 사랑하는 자를 동일시한다(2:5).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하 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받았으며, 세상에서는 가난해도 믿음에는 부요한 자가 아 닌가? 그 모든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하나 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요 믿지 않는 자 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해본 적이 없고, 주님을 마음 보좌 에 모신 적이 없는 자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 신의 최고의 가치요 궁극적인 의미로 여긴다.
따라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둘 수 없고, 심지어 는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즐겨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넘어지고 실패할 때도 많겠지만, 마음 중심에서는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을 목말라 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
2. 영광과 형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 며, 그분의 장엄하심과 위대하심의 발현(發現)이다. 따라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 번째 길은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보 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가 목적하는 바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 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찬양받아 마땅한 분이시기 때 문에, 그분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자연스럽게 찬탄이 우러나 오기에 우리는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도취에 빠지기 위해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원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 리의 찬송을 받아야 비로소 힘이 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 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선하심과 은혜를 맛보고 그 사랑에 반응하게 함으로써 우리와 함께 사귐을 누리기를 원하신 다. 많은 사람이 예배를 즐거워하지 않고 지겨워하는 것은 예 배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온 국민이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한 마음이 되 었던 감동을 기억하는가? 평소에 축구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 도 아닌데, 그때만큼은 우리 팀에 대한 애정과 감탄을 표출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환호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 럽고 자발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기가 더 힘들었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누구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둘째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 을 본받음으로써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들이 우리 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을 보고 찬양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의 수준에 도달하기를 원하신다. 달이 햇빛을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도 그리스 도의 형상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때,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보는 것과 반영하는 것,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된다(고후 3:18). 나 다나엘 호손(Nathana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저 멀리 인자하고 숭고한 큰 바위 얼굴을 늘 보 고 흠모하면서 자라난 어네스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인품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참된 성자는 먼저 예배자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님을 닮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바울은 인간의 문제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 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진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회복을 포함해야 한다. 구원은 단지 완벽한 환경 인 낙원에로의 장소 이동만이 아니다. 환경의 변화가 아닌 존 재의 변화가 구원의 핵심이다.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고 성 화가 완성되면, 그때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계 21:4). 그때까지 주님은 우리에게 좀더 나은 환경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 좀더 나은 존재가 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해주신다. 주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역경을 잘 통과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님 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본 사람이면 누구든 그분 닮기를 가장 큰 소원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 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바 울이 말대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환난 자체를 즐거워 할 수 없다. 다만 환난을 인내로 통과하면 우리의 성품이 연단 을 받고 참된 소망을 품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즐거이 감 당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며, 그로 인해 가치관이 바뀐 사람이다. 이제 바라고 원하는 대상과 내용이 달라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더는 재 물, 쾌락, 명예, 권력, 이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 등을 원하지 않 는다. 우리가 사모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장차 올 하나님 의 영광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 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 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 18).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행복(happiness)이 아니라 거룩 함(holiness)이다. 하지만 실상을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거룩함 이야말로 행복인 것이다.
3. 창조의 영광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는 창조보다는 구속의 교리를 강조 해 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는 구속의 진리 와 그 체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속 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타락한 곳에 불과하다. 그들 은 모든 것에 미친 죄의 파괴력을 보려고 한다. 이 또한 바른 성경적 관점이다. 세상에 미친 타락의 영향력은 심각하며, 죄 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한 구속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절 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을 볼 때 타락의 파괴력만 보고 창 조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심각한 왜곡이다. 비록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고 고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롬 8:22), 피조세계는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다. 불완 전하나마 여전히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우리는 그 영광을 보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 창조는 선하고 아름 답다(창 1:31). 창조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창조를 즐거워하고 감사할 대상이다. 그것이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합당 한 태도다.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 이 세 상은 경이요 신비다. 우리의 눈길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솜 씨가 드러나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다. 신선한 공기, 밝은 햇살, 화사한 꽃, 청아한 아침이슬, 빛 나는 별들, 눈 덮인 산봉우리, 샘과 강과 바다, 북극의 빙하와 열대의 섬들, 나무와 숲과 새들, 바람, 그리고 구름.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보면 살아있다는 것이 너 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 을 의탁할 때, 삶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눈물짓지 않을 수 없다. 관광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일본인 관광 객들이 안내자의 깃발만 보았다고 답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 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 나에게 사로잡히고 나에 게 찌들어 창조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의 세계를 바라보자. 하나님의 솜씨에 매료되어 우리의 눈길 이 창조의 영광에 고정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있다. 우리가 창조를 볼 때 표면 만 보지 말고 이면도 보아야 한다. 하나님 그분을 보아야 한다.
“사람의 제일 가는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4. 네 종류의 기독교
대학생 때의 일이다. 텍사스 달라스의 한 교회에 출석 중이었 던 나는 목사지망생이라는 이유로 담임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나는 종종 목사님과 신앙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서 어 떨 땐 목사님의 귀한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내 의견을 조심스 레 말씀드리고 목사님의 칭찬이나 교정을 받기도 했다. 한 번 은 경험을 해보니 네 종류의 기독교가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나는 영락교회에서 자란 터라 전통적인 장로교 스타 일의 교회에 가장 익숙했다. 좀 더 커서는 장로교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순복음교회를 알게 되었고, 또 민중신학 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적인 교회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거기 에 이들 개신교 외에 천주교가 있었다. 이러한 여러 유형의 교 회들을 지적한 것은 이들 교회들이 보여주는 영성의 특징들이 상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로교회로 대표되는 전통적 교회들은 말씀을, 순복음교회는 성령을, 자유주의적인 교회는 사회참여를, 천주교는 수도원적 영성훈련을 강조하는 듯싶었 다. 목사님은 내 관찰에 웃으시면서 각 교단의 장점만 따르면 좋겠다는 내 의견에 기꺼이 동의해 주셨다. 후에 나는 영성에 관한 권위자로 여겨지는 리차드 포스터 역시 영성의 다양한 스타일에 대해서 거의 같은 분류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목사가 된 후 개인신앙을 위해서만 아니라 교우들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생겼기에 참된 영성이 무엇인 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양한 영성에 대한 대화 를 나눈지 약 25년이 지난 요즘에는 교단간의 차이가 많이 줄 어든 듯 보인다. 말씀, 성령, 사회참여, 수도원적 영성훈련은 어느 한 교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범 교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즘 나는 외형적인 영성의 스타일의 차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시각에서 기독교의 다양성을 보고 있다. 바른 영 성을 추구하는 것은 방법이나 스타일의 차이가 문제는 아니라 는 생각이 든다.
먼저 “교양/문화적 기독교”를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속한 자 들은 기독교를 삶의 외형을 치장하는 장식품이나 문화적 관습 으로 이해한다. 성경은 고전이니 교양인이라면 한번은 읽어보 아야 한다거나,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라고 소개하는 데 그치 는 정도의 인식에 머무는 기독교가 여기에 속한다. 마피아 영화를 보면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면서도 천주교의 의 식을 따라 엄숙하게 장례식을 거행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밖 에서는 기관총을 멘 자들이 살벌한 경호를 하고 있고, 안에서 는 대부의 가족이 신부의 인도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 들에게 기독교는 문화요 관습일 뿐이다.
둘째로 무속/기복적 기독교가 있다. 무속주의란 영매(무당) 를 통해 신들의 힘을 빌고자 하는 신앙형태이며, 세속적인 복 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와 함께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실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불교(스님 무당)와 기독교(목사 무당)는 포장만 달리했지 실상은 무속/기복주의의 변형에 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셋째 도덕/율법적 기독교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유형보다 나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좀더 고상하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자유주의적인 교회들은 인간화나 인격함양 등의 도덕 기 독교를 말하고, 보수주의적인 교회들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규 정하는 율법적 형식의 기독교를 말한다. 문제는 이 수준의 기 독교만으로는 양심적이고 윤리적으로 살려는 비기독교인들 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나는 참된 기독교는 오직 “생명/능력의 기독교”뿐이라고 생 각한다. 기독교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자들은 그분의 생명을 경험한다. 이 생명의 체 험이 없는 기독교는 가짜다. 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생명 이 없는 기독교는 죽은 것이며, 그 속에 능력이 없다. 어떤 능 력을 말하는가? 기적을 행하고 은사들을 발휘하는 능력이 아 니다. 그런 능력은 거짓선지자들도 행한다. 참된 기독교의 능 력은 사람을 중심에서부터 회개케 하는 변화의 능력이요, 진 실함과 거룩함으로 이끄는 성화의 능력이요, 모양만 있는 경 건이 아닌 참으로 경건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능력이다. 복음 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린다. 중생한 자들, 성령을 모시고 하 나님(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이 성화의 능력을 경험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교양으로 아는가? 내게 세속적 복을 주 는 무당으로 아는가?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도덕적 스승으로 아는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아는 자만이 그분의 능력을 맛 본다.
5. 기독교의 쾌락주의
존 파이퍼(John Piper)는 “Desiring God”나 “Hunger for God” 등을 저술한 탁월한 신학자요 목사다. 그는 기독교 쾌락주의 (Christian Hedonism)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쾌락주의’라 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 는 일반적인 쾌락주의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고 있다. 그 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꼭 들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해 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 그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소요리문답의 제 1항을 다음과 같이 고쳐 쓴다. “사람의 제일 가는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하나님이 인간을 노리개 감으로 취급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과 영광이 또 있을까? 하 나님이 우리를 즐거워하시는 것은 아이를 즐거워하는 부모의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아이 사랑에 푹 빠진 나머지 아이가 예 뻐 어쩔 줄 모르는 부모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도 당신을 기뻐해 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의 기쁨이 되고 싶어 하신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겸손이요 사랑이라 고 생각한다. 아무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 고 기뻐하기 위해 창조하셨고, 또 스스로 그 인간의 기쁨이 되 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파트너로 만드시고, 우리와 깊은 사랑의 교감 속에서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가장 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억만 분의 일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숨 막히는 감동에 충격과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 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 기독교 쾌락주 의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힘이요(느 8:10), 존재 이유다. 찬송가 499장의 후 렴처럼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6. 기독교의 핵심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을 고르라면 나는 단연코 요한복음 3:16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유명하기만 한 것이 아 니라, 실제로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성경전체의 요절 로 손색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간이 될 만한 몇몇 성경 구절을 나무에 비유하여 인생목(人生木)이라고 이름한 적이 있 는데, 그중 뿌리에 해당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었다. 그리 스도인의 삶은 복음에 뿌리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몇몇 실체들(substances)과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하나님, 세상, 독생자(그리스도), 믿는 자 등 네 실체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세 상을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주신 분으로 묘사된다. 왜 하나님 이 세상을 사랑하실까?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 틀림 없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신 분이기도 하다. 이 짧은 표현에 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없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삼 위일체(적어도 이위일체)적 관계를 감지하게 된다. 독생자를 주 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이 그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요 사랑 의 구속주로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한편 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독생자를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하는 존재다. (여기서 세상은 인간 세상, 즉 인류 를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타락한 존재로서 구원받아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독생자를 생각해보자. 요한복음에서 독생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나신 자(모노 게네스, monogenes)다. 초대 교부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창조 되신 분이 아니라 나신 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본성, 즉 신성 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만 하셨다면 “주셨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 는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속사역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믿는 자가 나온다. 믿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 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그분이 주장하신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인 자다. 요한은 믿는다는 것은 곧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면 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요 1:12-13). 영생을 얻는 것과 하나 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같은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영생과는 반대로 멸망에 처하게 된다. 세상에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영생을 얻는 자와 멸망에 처하는 자가 함께 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 절이 요한복음 1:10-11이라고 말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 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처 럼, 우리도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전해야 한다. 세상은 하 나님이 이미 독생자를 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구원 또는 영생 은 이미 독생자를 통해 세상에게 주어졌다. 세상이 할 일은 구 원을 새롭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구원을 받아들 이는 것이다. 독생자를 믿는 것이다.
이 짧은 한 절에 참으로 많은 진리가 들어있다. 여기에는 신 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이 담겨있고, 직접 표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암시되어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구원을 위한 실제적인 해결책 이 역사적, 객관적으로 마련되었음을 보여주는, 너무도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하라”(Do)는 율법이 아니 라 “되었다”(Done)는 소식이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구원 의 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사랑의 감정과 태도 를 지니신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랑을 가장 큰 희생의 행위로 실천하셨다. 나는 이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7. 기독교에 대한 오해
인터넷상에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가장 흔한 공격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에 보내고, 갖은 나쁜 일을 해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보낸다 니,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주장에 반박 하는 기독교인들의 댓글은 대체로 감정적일 뿐 문제의 핵심을 빗겨간 느낌이다.
우선 그들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를 오해한 채 공격한 것 이다. 기독교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 람은 아무도 없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해 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그 마음이 거짓되고 부패했 으며, 죄의 본질인 자기중심성의 노예이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판 때 모든 실상이 드러나면, “착한 사람도 예수 안 믿었다 고 지옥에 보내는 것이 공의로운가?”고 하나님을 공박할 사람 은 없을 것이다.
둘째, 기독교는 온갖 나쁜 일을 해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예수를 믿기 전에 행한 모든 악 한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 용서를 받는 것이 맞 다. 기독교가 복음인 이유가 그것이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 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반드시 변 하게 되어 있다. 죄를 안 짓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 고 성령을 모신 이들은 예전처럼 죄에 무감각하거나 습관적으 로 범죄할 수 없고, 죄를 범했더라도 성령의 근심을 느끼기 때 문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죄에 둔감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실 것이고, 징계도 없고 회 개도 없다면 그는 아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 이다. 비기독교인들이 착한 사람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보 내는 분이라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은 그들의 무지 때문이지 만, 온갖 죄를 지어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기독교가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다. 교회가 복음을 바로 가르치지 못해서 그렇다. 비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기독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는 데 문제가 있다. 복음의 회복이 시급하다.
8. 기독교의 특수성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은 기독교 자체 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소위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향한 것이 다. 즉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 의 위대한 스승이시고 4대 성인 중 한분으로서 참으로 훌륭한 것을 인정하지만, 그분을 믿는다는 이들이 그 가르침대로 살 지 않고 몹시 위선적이라는 것이 그들의 비판의 핵심이다. 간 디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인간의 언어로 쓴 글 중에 가장 고 상하고 높은 도덕적 가르침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나는 이런 비판 에 그다지 놀라지 않고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오강남씨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서도 그랬다. 교리에 대한 비판에는 동 의할 수 없었지만 교회의 타락상에 지적하는 말에는 공감하였 다.
하지만 사실 기독교의 가장 힘든 부분은 교인들의 그릇된 행태가 아니라 교리 자체다. 특히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야말로 세상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아무 도 이성과 양심을 좇아 올곧게 살면 진리에 이를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보편적 구원론을 말하지 않고, 예수라는 한 역 사적 인물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특수한 사건을 통해서만 구원 을 받을 수 있다는 대단히 배타적 구원론에 불편해한다. 거기 에다 선택 교리까지 더해지면, 그 불공평함과 불공정함이 야 기한 의분(義憤)은 거의 폭발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 먼저 성경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죄로 인해 심히 제한되고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는 죄와 교만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상실하게 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양심으로 하 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나온 연대적 존재로서 타락이라는 공동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구원도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 도와의 연대적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디. 그 래서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각자 깨달음과 도덕적 수양을 통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 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은 괴로움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의 진입이며, 이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이 내미신 손(예수님)을 잡을 때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