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삶의 원동력
인간은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 이기에 몸의 필요를 채우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졌다.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은 사실상 삶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 한 욕구들이다. 금식을 하면 우리가 얼마나 먹기 위해 사는 존 재들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기에 정신 적 욕구도 있다. 무엇인가를 알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지적 호 기심,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감상하고 싶어 하는 예술적 욕구, 소속되고 인정받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인격적 필요, 옳은 것 을 추구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무감 등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인 돈에 대 한 집착, 탐심이 가장 강한 욕구다. 우리는 대체로 신체적 욕 구는 저급하고 정신적 욕구는 고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신체적 욕구이든 정신적 욕구이든 건강한 욕구 가 있는 반면에 병든 욕구도 있다. 게을러서 자꾸 더 자고 싶 어 하거나 끊임없이 미식을 탐하는 것, 음란한 정욕에 사로잡히는 것 등은 신체적 욕망의 병든 모습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 는 것은 정당한 욕구이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항상 다른 사람 들의 인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그릇된 명예욕이다. 도덕적 의무감은 고상하게 보이지만, 자기 의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 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바리새적 도덕주의로 이어질 때는 추악해진다.
신체적, 정신적 차원을 너머서 영적 차원을 이해할 때, 비로 소 인간의 욕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그분을 전심으로 섬기며 살도록 지음 받았다. 죄로 인해 관계가 끊어진 후, 인간은 하나님을 모 르고 그릇된 영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영향이 정신적, 신 체적 영역에까지 미친 것이다. 인간은 영적인 필요를 제대로 채울 때, 다른 욕구들도 건강과 균형을 되찾게 된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 고자 하는 영적 욕구가 가장 강한 것은 당연하다. 내 삶의 원 동력은 무엇인가? 오늘도 나는 수많은 욕망의 다발 속에서 이 리 끌리고 저리 당기면서 산다. 때론 저급하게, 때론 고상하게. 하지만 그 모든 욕망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내 중심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가장 강한 갈망은 주님에 대한 목마름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10. 용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비난 을 종종 듣는다. 부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속으로 이렇게 대꾸한다. “교회 다닌다고 다 그리스도인 은 아니다. 입으로 믿는다고 고백한다고 다 참 신자는 아니다. 참으로 거듭난 자들은 분명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르다. 그것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참 신자라 해도 겉으로만 보면 비신 자들과 비슷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용 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이 사실에 주목해 야 한다. 겉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도 내면은 근본적으 로 다른데, 그건 용서와 관련하여 특히 그렇다. 진정한 그리스 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통감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사 모한다. 이 점이 비신자들과 가장 다르다. 의롭게 살지 못했을 때 한쪽은 가슴 아파하고 통회한다면, 다른 쪽은 이에 둔감하 다. 참 신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할 수밖에 없다. 또 그리 스도인은 남을 진심으로 용서한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 다. 완전한 것은 고사하고 주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자신의 죄성을 더 깊이 깨닫고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 실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용서하셨고 받아주셨음을 안다. 그분 이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만 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면, 그는 잠시 내가 받은 용서의 은혜에 무감각해졌거나 하나 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했을 수 있다. 사죄의 은총에 대한 확 신과 이로 인해 타인을 향한 용서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참 된 그리스도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사랑받은 자는 사 랑하며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한다. 죄인들끼리의 사랑의 팔할 은 용서이다.
그럼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18장에 용서에 대 한 주님의 비유가 나온다. 비유는 독자의 마음을 격동하고 감 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을 비유 안으로 끌어들 이는 힘이 있다. 또한 자신들이 내린 판결로 스스로 깨닫게 하 는 독특한 힘이 있다. 주님은 참으로 비유의 천재이셨다. 왕에 게 탕감을 받은 종의 빚에 비하면 그 종에 대한 동관의 빚은 육십만 분의 일도 안 된다. 육십만 불 용서받은 사람이 일불의 빚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이 종이 어떻게 그런 큰 빚을 지 게 되었는지는 이야기의 초점이 아니다. 비유는 이 종이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동관의 빚은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비유를 들으면 누구나 동 관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 면 되겠느냐고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 라도 용서하라고 답하신다.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받은 용서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용서의 당위성을 안다고 용서하기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 다. 모욕과 손해를 떠올릴수록, 또 상대의 비인격적 태도와 불 의를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용서 받을 자격이 없 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용서와 관련하 여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용서는 그 대상이 진심으로 잘못 을 인정하고 뉘우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종이 나 동관은 둘 다 자신의 빚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 잘못 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용서한다면, 그건 불의를 용납하는 것 일 뿐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물론 상대가 뉘우칠 때까지는 미 워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 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 때 우리는 C. S. 루이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께 서 490번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490번이나 잘못해도 용서하 라는 뜻이 아니다. 한 번의 잘못에 대해서도 490번씩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한 잘못에 대해서도 반복해서 용서해야 한다. 참으로, 진심 으로, 중심에서부터 온전히 용서하려면 그래야 한다. 진심으 로 용서해도 시간이 지나면 미움이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어 느덧 더는 미워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절감하고, 의를 사모할수록 내게 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제자의 길은 용서의 길이다. 주님의 용서를 더욱 깨닫고 나도 기꺼이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는 여정이다
11. 위선에 대하여
마태복음 23장에는 주님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을 질타하시는 내용이 담겨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 셨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셨지만, 위선에 대해서만은 가혹하다 싶을 만큼 준엄하게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당대 백성들에게서 존경도 받던 지도자 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만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하는,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어야 했다. 주님은 위선을 가장 미워하신다. 따라서 제자의 길을 가려는 우리 역시 위선 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도 “외식하는 자들이여”라고 분노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모습의 위선자를 먼저 생각해보자. 서 양에서 위선자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은 프랑스의 희곡작가 몰리에르의 “타르튀프(Tartuffe)”라는 작품 속 주인공이다. 타 르튀프는 경건을 가장하여 한 부자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욕망 을 채우려 했다. 그는 가장 종교적으로 헌신되어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 행세를 했지만, 실상은 전혀 믿음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 희곡의 영향으로 프랑스에서는 “타르튀프”가 위선자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타르튀프는 주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과는 많이 다르다. 타르튀프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실 제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타르튀프의 위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을 꾸미고 가장 했던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자신들이 겉으로 드러낸 모습과 또 실제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자화상이 실상과 다른 자들이었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타르튀프는 위선보다는 사 기에 가깝다. 우리는 남을 의도적으로 속이려고 하지 않기 때 문에 자신은 위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리 새인들의 위선이 더 심각하고 교묘한 것은 자기기만 현상 때 문이다.
둘을 좀 더 비교해보자. 먼저 둘은 목적이 달랐다. 둘 다 선 하고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기 원했지만, 타르튀프에게는 명예 가 아니라 돈과 출세가 목적이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에게 는 명예(남들의 칭찬) 자체가 목적이었다. 또 타르튀프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하다고 믿었고, 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타르튀프가 남을 속이는 사기성 위선자였다면, 바리새인들은 남을 속이기 전에 스스로 속았던 자기기만성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이란 무엇인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선 한 모습과 그 내면적 실상이 다른 것이다. 단지 다를 뿐 아니 라 속이는 것이다. 타르튀프는 남을 속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기 자신들부터 속였다. 타르튀프와 바 리새인들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는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다 만 어느 쪽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벗어나기 힘든 문 제인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바리새인들 쪽이다. 자기기만의 문제는 그만큼 간파하기 힘들고 교묘하다.
왜 자기기만의 위선에 빠지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 고 바르게 살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이런 선한 소원이 있기에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끊 임없이 자기애의 유혹을 받고 있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 님과 선을 추구하려던 목적이 슬며시 자기추구로 변질된다. 이때 자기기만 현상이 생긴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인 성향을 좇아 행하면서도 자신의 실상을 직면하고 싶지 않 아서,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합리화를 하고, 그 뒤에 자신을 숨기곤 한다. 이 자기합리화야말로 자기기만 이요 위선이다. 자기 욕심을 좇아 살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 는 척 하는 것이다. 가끔은 그런 간극을 의식하지만, 그런 의식마저 억누은 채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실 상이다. 거듭난 사람들, 성령님을 그 안에 모신 사람들은 이런 자기기만의 상태에 너무 오래 머물 수 없다. 성령님께서 끊임 없이 지적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속일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 마 음을 아프게 찌르시고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거듭난 사 람은 죄와 거짓에서 벗어난 사람이기에 죄가 드러날 때 회개 하고 위선이 적발될 때 자각하게 된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 첫 걸음이 자신의 위선을 깨 닫는 일이다. 성령만이 위선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 예수 님은 우리의 위선을 책망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위선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
12. 옛 사람과 옛 성품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런가 하면 로 마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며, 더는 죄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구절들을 잘못 해석하여 성화의 원리를 오해한다. 그들은 우리가 믿음 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면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처리된다 고 생각한다. 이 표현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 때 처 리되는 자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이다. 만일 이 자아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또는 육신이라고 부르는 ‘옛 성품’을 가리킨다 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이해다. 이들은 자아가 죽었으니 우리 안에 옛 성품으로서의 자아가 더는 작용하지 않는 것으 로 생각하며,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더는 죄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본다. 하지만 실제 경험상 자아는 전혀 죽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기도 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아는 옛 성품이 아니라 옛 사람, 즉 예수 믿기 이전의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님 을 믿을 때 그때까지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 혀 죽은 것으로 간주해주신다는 뜻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 해 죄의 형벌을 다 받았고, 그 결과 죄에서 벗어났다. 죄에 대 해 죽었다는 말은 이제 죄에 대해 빚진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더는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옛 사람 의 죽음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내 밖에서, 그리 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은 신비스럽게 깨달아야 할 진리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배워야 할 진리다. 그 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을 믿을 때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죽음은 법적으로 간주되는 것(신분의 변화)이고, 부활은 내 영이 살아나는 실제적 체험(상태 의 변화)이다. 새 생명을 얻은 자는 그 안에 새 성품을 갖게 되 고, 이 새 성품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옛 성품과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는 옛 성품(육신)을 좇지 않고 새 성품(성령)을 좇 아 행함으로써 주님의 생명을 실제로 맛보고 승리할 수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고 우리의 죽을 몸이 부활할 때, 우리는 옛 성품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13. 성숙한 신앙인의 특징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숙한 신앙인의 특징을 단단한 식물을 먹 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5:14). 여기서 단단한 식물은 어린 아이가 먹는 젖,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 내용과 대조되는 것 으로서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훈련된 사람 들이 깨닫고 소화할 수 있는 말씀의 깊은 차원을 의미한다. 저 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강론을 하는 중에 이점을 지적하는데, 그는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깨 달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했으니, 그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깨달음을 통해 기록할 것을 받았을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세가 시내산 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그런 경우에 속할지 모르지만, 누가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등 직접 자료를 모으고 조사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에 관련지어 설명하는 부분도 마찬가지 다. 그는 메시아 본문으로 알려진 시편 110편 4절 말씀을 깊이 묵상한 결과 구약의 전체 체계를 새롭게 바꾸시는 그리스 도의 신분과 사역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 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본문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너”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메 시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 아론의 자 손들만 맡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자손으로 오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론의 제사장직과는 무관하신 분이 다. 하지만 구약에는 아론의 제사장직 외에 또 다른 ‘한 제사 장직’이 언급되고 있다. 바로 본문이 말하는 멜기세덱의 제사 장직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을 따라서 예수님은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그분의 죽음을 영원한 제사로 설명한다. 예수님은 아론의 제사장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우월한 멜기세덱의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바쳐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우리의 속죄를 완성 하셨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의 논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 는다. 그는 제사직분이 바뀌면 그 제사제도를 담고 있는 율법도 바뀌어야 하고, 또 율법이 바뀌면 그 율법을 근간으로 하는 언약도 바뀌어야 함을 지적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오신 대제사장이시라면, 이제 아론의 제사장직 의 근거가 되는 모세 율법도 바뀌어야 하고, 율법을 근간으로 하는 시내산 언약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그 일을 이루신 것이라고 설 명하면서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으로 이어간다.
놀랍지 않은가? 시편 110편 4절 한 절에 이 모든 함의가 다 담겨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 한 결과 이 모든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신 분과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계시에 의존할 필요가 없 었다. 이미 구약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합 당한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식 의 묵상이 가능한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실상 신약의 저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은 전부 구약을 근거로 예수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 랬고, 요한이 그랬다. 예수님도 자신의 사역을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인자와 이사야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연결해서 이해하 셨다. 주님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여 메시아에 대한 바리 새인들의 천박한 이해를 흔들어놓기도 하셨다. 우리는 이분들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시를 받아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된 것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면도 많이 있지만, 이분들 은 무엇보다도 구약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 고 연구함으로써 신약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성경말씀이 어렵다고 불평하면서 “쉽게 쉽게 좀 더 쉽 게” 만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 개인적 으로는 우려스럽다. 신학자들이 현학적인 접근으로 말씀을 불 필요하게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우리의 지적 게으름이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말씀에 대한 열의가 없는 것은 개인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성숙도의 문제요 신앙의 자세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성숙한 신앙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깊 이 묵상하고 그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는 신앙임을 잊지 말자.
14. 이미와 아직 사이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이 갖는 오해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 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할 때가 많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있다. 따라서 지금은 하나님 나라 와 이 세대가 공존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한편 으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고 기뻐하지만, 동시 에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구원이 다 이뤄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 땅에 임할 때, 우리의 몸은 구속되고(몸의 부활을 입고) 구원은 완성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와 같다. 그들은 이미 애굽으로 부터 나와 노예생활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가나안에 들어간 것 이 아니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우리 시대의 많은 그리 스도인들이 기복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런 점을 오해하였기 때 문이다. 가나안,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 건강과 부뿐만 아니라 완전한 생명과 부족함 없는 풍요를 맛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광야를 지나야 한다.
신명기는 광야생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 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 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광야생활은 훈련의 기간이며 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는 데 있었다. 왜 그들을 낮추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는 백성으로 창조한다는 듯이 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시 는 곳이 바로 광야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을 몰랐고 그 광야에서도 우상을 숭배하였다. 황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은 자 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 들이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배워야 했다. 자 신이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겨 야 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 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는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간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이 미 이뤄진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 이, 즉 광야에서 살게 하신 이유다.
15. 기도와 전도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을 처음 접한 곳은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가르치는 수레바퀴 예화였다. 이 예화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중심축에 해당되고, 그리스도인의 순종하는 생활은 바깥 테에 해당된다. 그리고 중심축의 힘을 바깥 테에 전달하는 네 개의 살은, 수직 방향으로 말씀과 기 도, 수평 방향으로 교제와 증거를 뜻한다. 이 수레바퀴는 그리 스도인의 삶의 기본적인 원리를 균형 있게 잘 가르쳐주는 탁 월한 예화다.
언젠가 네비게이토 선교회에 오래 몸담고 계셨던 어떤 목사 님과 대화하던 중 그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성경공부는 좋아하 지만 기도 모임에는 잘 오지 않는다. 모여서 교제하는 일은 즐 거워하지만 흩어져서 전도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그때 그 말씀에 공감했던 것은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 이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는 일은 즐겨하는 편인데,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는 늘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기도와 전도는 우리 주님의 기본 생활패턴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신 후, 다시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웃 마을로 전도 하러 가자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삶의 리듬은 바로 이 두 활동 의 반복이었다. 혼자 계실 때는 기도하셨고, 다른 사람들과 함 께 계실 때는 하나님과 천국복음을 증거하셨다. 바울도 골로 새서 4장에서 기도와 전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의 삶은 두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 과의 관계. 이 두 관계의 기본원리는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 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기도와 전도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도는 언제나 말씀을 포함하고 전 도는 언제나 봉사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은 분리 될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요 대화이며, 언제나 하나 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듣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또 전도는 하 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니 말 뿐 아니라 행동으 로도 이루어져야 하며, 행동으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봉사 이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기도와 전도에 힘쓴다는 뜻 이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이젠 고전이 된 이 표어가 요즘 절실하게 다시 다가온다
16.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아이작 왓츠(Isac Watts)가 작사한 찬송가 147장은 언제 불러도 마음에 감동을 준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 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한 절 한 절 음 미하며 부르다 보면 어느덧 눈물이 흐른다. 이 찬송만이 아니 라 십자가에 대한 찬송들은 큰 감동을 준다. 왜일까? 그건 십 자가에서만큼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극 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존재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큰 필요를 채워준다. 하나 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에 들어가고 싶 어 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 말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 된 인간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 으로는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에 목말라 하고 있 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랑으로 바 뀌는 것을 보게 된다(롬 1:18; 8:39).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이 지 않고 구체적이다. 관념적이지 않고 역사적이다. 나를 위해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신 사랑, 버림받고 모욕당하신 사랑, 끝내 우리 대신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신 아들의 사랑, 자기 아 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사랑, 십자가 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본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 이토록 악과 고통이 많은 것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기독교 신관에 대해 이보다 더 예리한 도전은 없다. 악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변 호하는 것을 신정론(theodicy)이라고 하는데, 그 궁극적인 해답 은 역사 너머 심판대 앞에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를 통해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 의 악에 초연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그 악의 횡포를 자신의 온 몸으로 받으셨고, 부활을 통해 악에 대한 궁 극적 승리를 선포하셨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하나 님을 본다. 우리의 아픔 한 가운데 들어오신 하나님, 죄와 죽음 의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시고 거기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 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되는가? 공의가 실행되지 않아 불평이 생기는가? 어느새 마음이 강퍅해지고 교만해져 있는 가?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미혹을 받고 있는가? 십자가를 바라 보라. 거기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 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라. 십자가를 바 라볼 때, 모든 의심과 불평, 교만과 욕심이 사라질 것이다
17. 왜 새 계명인가?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옛 계명과 동일한 듯이 말 하기도 하고 또 새 계명으로 구분해서 보기도 한다. 성경을 주 의 깊게 묵상하지 않으면, 옛 계명과 새 계명을 혼동하기 쉽 고, 새 계명의 참 뜻을 놓치기 쉽다. 다시 한 번 “서로 사랑하 라”는 계명이 왜 새 계명인지를 살펴보자.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 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 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7-8). 그는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부르기도 하고 새 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둘의 차이는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이 주어지는 상황에 있다. 즉 새 계명은 어두움이 지나 가고 참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 빛이 비친다는 것은 새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새 시대는 새 언약의 시대다. 주님이 오셔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새 언약의 백 성으로 삼으신 시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계명의 내용 자체는 같지만, 새 언약 안에서는 그 대상에 차별성이 생 긴다. 우리는 먼저 새 언약의 백성 된 자들 사이에서 서로 사 랑해야 한다.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도 여전히 우리의 의무이 지만, 우리는 먼저 주님의 몸의 지체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 다. 요한도 위의 말씀에 이어 “형제 사랑”을 말한다. 서로 사랑 하라는 것은 단지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지체들끼리 하나가 되라는 말이다. 바울도 지체들 간 의 사랑의 우선성을 말한다(갈 6:10).
새 계명은 대상 뿐 아니라 기준과 동력에 있어서도 새롭다. 이웃 사랑의 기준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었다면, “서로 사 랑”의 기준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다.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셨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이 주님의 사랑을 좇아 서로 희생 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은 “서로 사랑”의 기준이 될 뿐 아니라 동력이 된다. 주님의 사랑을 참으로 받은 사람들 이라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